"눈을 맞추면 안 돼!"
혹시나 길에서 머리카락이 뱀 모양이고, 멧돼지의 엄니와 청동으로 된 손, 황금의 날개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눈부터 깔도록 하자. 메두사다.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눈'이다. 그와 눈을 맞추게 되는 사람은 돌로 변하게 된다. 메두사와 시비가 붙게 된다면, 일단 조용히 눈을 내리고, 평소에 잘 닦아 두어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니는 방패를 꺼내어, 방패에 비친 메두사를 보며 싸우도록 하자.
많은 사람이 예배 중 사도신경을 만나면 이 방법을 택한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면, 살며시 눈을 감는다. 왜 눈을 감을까? 사도신경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눈을 바로 뜨고 한 구절도 허투루 넘기지 않으면, 우리의 이성적 사고가 돌처럼 굳지 않고서는 고백을 마치기 어렵다. 물론, 눈을 감고 암송하며 의미를 깊이 곱씹을 수 있고, 반복을 통해 무의식에 새기며 고백을 내면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순기능에도, 암송은 우리가 그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도 사도신경을 마칠 수 있게 한다.
사도신경은 본래 '공적 고백'이다. 개인 경건을 위한 기도문이나 골방에서 묵상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고대의 마법 주문은 더더욱 아니다. 사도신경은 자신이 믿는 바를, 그리고 살고자 하는 바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자리는 세례와 연결되어 있다. 세례를 통해, 옛 세상과 결별하고 새로운 세상 속에서 살기로 결단한 사람의 선언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과연 과거의 사람이라고 이 고백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때, 거리낌이 없었을까? 창조주 하나님, 성령의 잉태, 동정녀, 부활, 재림, 영생, 그 모든 것이 고대인이라고 쉽사리 믿어졌을까? 그들이 이 고백을 의심 없이 수용하는 특별한 뇌를 가졌을 리는 없다. 물론, 과학 지식과의 충돌은 우리보다 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정치적 충돌, 세계관의 충돌은 우리보다 더욱 강렬했다. 이 고백이 그런 충격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비신자들과 구분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확인하는 증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고백 탓에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은 우리말과 다른 어순으로, '나는 믿습니다'(Credo)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믿는다'는 말을 '불확실한 명제를 사실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credo는 '마음, 중심, 심장을 내어 준다'는 뜻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어디에 뿌리내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사도신경은 맹목적으로 긍정해야 하는 불변의 진술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뿌리내릴 세계관을 담은 이야기이다.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12개의 고백을 따져 보면, 믿음의 대상이 되는 층위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신경 앞에 '사도'가 붙은 것과 진술이 12개라는 사실과 관련해, 사도들이 한마디씩 던져서 만들어졌다는 전설도 있다. 물론 사도들의 조별 과제 내지 브레인스토밍 같은 이 전설적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다만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사도'의 뜻)이 세상에 외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도신경의 진술 12개는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 진술, 희망, 공동체 등으로 계속 바꾸어서 우리에게 들려준다. 문자 그대로 동의해야 하는 12개의 불변한 명제라기보다, 세상과 맞서는 공동체가 품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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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이러한 것을 되새긴다: 하나님은 선한 능력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고, 우리는 그 무한한 근원에 친밀하게 연결된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연결을 망각했고,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 그분은 세상의 욕망과 달리 거룩한 영에 이끌려 삶을 시작하셨다. 당시 마리아라는 힘없는 여성은 간음한 여인으로 내몰려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도 그 여린 몸으로 진리를 수용했지만, 빌라도라는 남성 권력자는 그 진리를 눈앞에서 보고서도 외면하고 죽음을 선고했다. 그 권력자는 예수께 사형을 선고하였고 그분은 세상이 닿을 수 없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살리셨고 들어 올려 하늘의 보좌에 앉히심으로 그가 보인 사랑과 평화, 섬김과 희생의 길이 옳다고 인정하셨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보이신 뜻 그대로 다시 오셔서 세상을 회복시킬 것을 기대한다. 그 기대를 불어넣어 주는 성령의 사로잡힘 가운데서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미 장차 올 세상의 사람으로 한데 묶여 있다. 우리는 죄 된 삶을 돌이킬 기회를 얻었고, 새로운 생명을 맛보며 하늘과 연결되는 새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사도신경을 세계관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과학적 사고와의 부딪침보다 더 큰 충돌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와의 격돌이다. 우리의 사고를 돌처럼 굳어 버리게 만드는 것은 사도신경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은 우리가 품은 새 세상을 향한 희망을 좌절시키며, 생기를 잃게 한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세상의 문화가 주입하는 당연한 근원, 현재, 미래에 대해 도전하게 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옛 세계의 질서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는 고백이며, 전복적인 선언, 세상의 관성에 저항하는 상상력이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형성해 놓은 낡은 질서, 차별과 폭력 지배와 위계의 낡은 세상과 대조되고 대안이 되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새로운 세상의 선언서이다.
우리를 돌처럼 만들려는 세상과 싸우려 한다면, 눈을 감지는 말자. 평소에 잘 닦아 우리 마음속에 새겨서 넣어 두었던 사도신경을 꺼내어 비추어 보자. 그리고 뜬 눈으로 옆을 보면, 함께 고백하는 동료, '교회'가 있다. 또 고개를 들어 보면, 사도신경이라는 그 이름에 묻어 있듯, 아득히 오래된 곳에서부터 같은 꿈을 꿔 온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 눈을 뜨고 사도신경을 고백하자. 그리고 보자. 함께 고백하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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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5, 2020 at 07:14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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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 버리기 사도신경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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